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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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M.lab] 사랑이라는 이름의 종교 (함돈균 소장)

2021-11-16

사랑이라는 이름의 종교 

생명체가 생존에 필요한 최적의 상태를 안정적이고 능동적으로 유지하려는 경향을 ‘항상성(homeostasis)’이라고 한다. 원어를 그대로 옮기자면 ‘동일한(homeo)’ 것을 ‘그대로 유지한다(stasis)’는 뜻이다. 항상성은 생명체의 자기방어 기제다. 생명체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외부의 미세한 변화를 지극히 예민하게 감지하고, 제 몸의 일부가 아닌 다른 것의 침입에 격렬하게 저항한다. 

덕분에 외부의 추위나 더위에도 일정한 수준의 체온을 유지하고, 바이러스의 침투에도 자기를 지켜냄으로써 병들지 않는다. 자기 아닌 것에 의한 신체 변이에 저항하는 자가 반응은, 타자에 지배 받지 않는 생명의 자유와 독립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사랑의 신비는 자기의식을 지닌 인간이라는 한 생명체의 항상성, 이 폐쇄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독립심이 타자 지향으로 열리는 극히 예외적 순간의 도래라는 점에 있다. 이 시간이 오면 개체는 타자 관점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는 기이한 경향성을 감내한다. 아직까지 인간만큼이나 복잡한 자기의식을 지닌 생명체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면, 사랑은 뭇 생명체의 ‘교미’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는 우주적 예외 시간이다. 교미는 DNA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려는 동일성의 강화 의도로 점철되어 있다. 내재적이라기보다는 ‘외재적’ 교섭이며 항상성이 깨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생명체에게 있어 사랑의 양상은 복합적이고 복잡하다. 그것은 내재적으로 체험된다. 그 양상을 어떻게 설명하건 간에, 이 시간에 타자가 주체의 의식 내부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온다는 사실만은 틀림없다. 주체는 지금까지 가까스로 마련해놓은 자기 생존의 최적성과 안정성을 느닷없는 타자가 흔들어놓는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인지하면서도, 즉 항상성의 파괴를 인지하면서도 자기 오염과 위험을 기꺼이, 아니 어쩔 수 없이 수락한다. 사랑의 시간에 주인은 내가 아니라 타자라는 바이러스다. 지금까지 자기다움이라 불렸던 정체성은 혼란을 맞고 열병을 앓는다. 치명적인 병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사랑의 바이러스는 개체를 죽음으로 끌고 가는 자연계의 미생물과는 달리, 어떤 특별하고 고유한 변증법을 통해 이 교류의 장에 있던 존재들을 일상과는 다른 생명 세계로 인도한다. 이 세계는 육체적 환희를 넘어서 있다. 열렬한 타자 지향이 개체 보호의 본능을 해체하면서, 항상성이라 불리던 자기동일성이 실은 자기연민, 자기주장에 사로잡힌 보잘 것 없는 에고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의 계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자연세계에서 유일하게 나르시시즘이라는 갑옷을 입고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에고이스트가, 자기를 다른 관점에서 각성할 수 있는 메타인지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 경험의 가장 특별함은 이것이 자연의 자연성, 다시 말해 본능을 거스르는 일종의 ‘극기(克己)’ 체험이라는 사실이다. 이 거스름에 깃든 타자 지향적 역동성은 그들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입구로 끌고간다. 너그러우면서도 열렬한 에너지의 타자 숭배가 수반하는 비극적 환희가 존재를 다른 위상으로 들어 올린다. 추락과 레벨업을 반복하는 이 역동의 과정을 ‘종교’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의 수난처럼, 사랑이라는 패션(passion)은 수난을 동반한 정념을 통해 과격한 존재 전환을 수행한다. 사랑이라는 수난, 사랑이라는 이름의 리추얼이 수행되는 특별한 시간에 주체들은 타자를 기름 부어진 자로 온전히 인정하고 수락함으로써 제 자신 역시 기름 부어진 존재가 된다.


#인문정신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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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
문학평론가.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인문연구소장을 지냈다. 현재 플라톤아카데미가 지원하고 있는 <인문정신문화 확산을 위한 포털 설립을 위한 연구> 공동연구원으로 참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