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준으로서의 자
‘척(尺)’은 도량형의 단위로서, ‘자’라는 말의 한자를 일컫는다. 낚시꾼들이 큰 고기를 낚았을 때 ‘월척’했다는 말을 쓰는데, ‘한 자 넘는’ 고기를 잡았다는 뜻이다. ‘자’를 뜻하는 ‘척(尺)’은 상형문자다. 손바닥을 펴서 무언가를 재고 있는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표현한 ‘그림’이다. 무언가를 재는 기준으로 쓰는 도구인 ‘자’처럼 각종 도량형의 측정이 원래는 ‘한 뼘’같은 신체 비례를 기준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립자의 세계를 재는 아주 작은 자나, 상상하기 어려운 광대무변의 우주공간을 잴 수 있는 엄청난 규모의 자들까지 나왔다. 이런 자의 발명을 통해 사람 시야 너머에 사람의 시야와 기준이 포괄하지도 못하고 추측하지도 못하는 규모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물의 길이와 부피와 무게를 재는 ‘자’는 공간 감각의 기준을 제공하고, 개인 간 물건 교환을 가능하게 하며, 측정을 통한 각종 기술의 발달, 세금의 수취 등 문명의 전진에 있어 전방위적인 필수물이다. 자는 기준 없는 세계에 기준을 부여하여 개별적이고 파편적인 감각에 계측에 관한 통일적인 원근감과 보편적인 합의의 기준을 부여한다. 법의 정신을 상징하는 정의의 여신이 한 손에 천칭을 들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인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준다’는 말은 정의가 ‘몫’을 정확히 잴 수 있는 자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함의를 지닌다.
공준이 가능할까
그러나 자연의 물리량을 계측하는 세계와는 달리 사회라는 인간계에서 누구나 합의할 수 있는 보편적 기준, 통일적인 척도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관점과 가치와 개인들의 사회적 위치, 문화적 차이와 역사적 단계에 따라 ‘기준’은 유동적이다. 인류라는 보편성을 이야기하지만, 차이는 보편성을 무색하게 할 만큼 크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그른가, 아름다움과 추함의 기준, 적절함과 부적절함, 정당함과 정당하지 않음의 기준은 각자 다르고 그래서 극히 불안정하다. 법과 도덕적 기율이 사회마다 시대마다 다르고, 경우에 따라서 그 내용이 매우 상이하기도 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사회에 행위의 공준으로서 강력한 터부와 법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으로 ‘자’의 불완전성을 증명한다. 삶의 역동 안에는 정해놓은 ‘자’를 인정하기 어렵고, 설령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자’ 자체가 생명을 제어하는 억압기제라는 인식을 통해 그에 저항하는 생명의 움직임이 있다. 분별도 하지 말고, 기준도 만들지 말라는 노자나 장자의 말씀도 결국 인공의 자를 만드는 일 자체가, 또 자를 정교화 하면 할수록 인간이 자연의 생기로부터 멀어진다는 얘기를 하는 거다. 그들이 반감을 보였던 문명화는 결국 ‘자’를 정교화 하는 문명화다.
어떤 사회가 강력한 통일적 척도로서 ‘하나’의 자를 갖게 될 때, 그 사회는 완전하고 더 효율적인 사회가 될까.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명령과 지시와 수행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지는 사회가 보다 진화한 세계일까. 최근 일본이나 중국 등 이웃나라에 대한 한국인의 반감을 관찰해 보면, 한국사회는 ‘하나의 상상의 자’를 완고하게 가진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한 국가 안에서도 개인들이 처한 다양한 정체성의 차이, 경험의 차이 의견의 차이 등을 무화시키고 하나의 관점과 생각으로 의견들을 통일시키려는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자’가 그것이다. ‘내로남불’이라는 용어는 이율배반에 관한 말로 21세기 한국사회에 무척이나 친숙하게 유통되고 있는 사회적 용어다. ‘내로남불’은 내가 지닌 ‘자’가 자기 자신에게도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자기분열 양상을 지시하는 동시에, 내 자를 기준으로 타인을 계측하고 억압하는 양상을 드러내는 증상적 용어다. 어떤 ‘자’는 남에게 엄격하게 들이밀기보다는 자기 모습을 재보는 데에만 사용하는 게 낫다. 그런 ‘자’를 우리 조상들은 ‘신독’(愼獨 스스로 자기를 살핌)이라고 불렀다.
생활인의 자가 닿지 못하는
사람살이를 하다 보면 정교하고 타산적인 생활의 ‘자’를 늘 들고 다니며 그것을 너무도 잘 사용하는 현명한 생활인들을 만나보게도 된다. 더치페이도 명확하고, 절세의 지혜도 탁월하며, 투재 대비 가성비를 기막히게 잘 재서 물건을 사는 방식을 보면 감탄을 하게 하는 생활인들. 무심한 일상인들은 잘 모르는 어떤 기회마다 응모하여 깜짝상품에 당첨되었다고 자랑하기 좋아하는 지인도 내 주변에는 있다. 사회적 척도에 따라 인생스케줄을 장기적으로 잘 재고 기획하여 시간을 잘 규율하며 사는 풍경은 우리네 일상적 풍경이다. 이런 풍경에서 ‘삶’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고, 어쩌면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장부의 일부로 ‘계산’되면서, 온전히 ‘살아지지’ 않고 자주 유예된다.
시인 김수영은 “무엇이든지/재볼 수 있는 마음은/아무것도 재지 못할 마음”이라며, “삶에 지친 자여/자를 보라/너의 무게를 알 것이다”(「자(針尺)」)는 시를 쓴 적이 있다.
사람들마다 재는 대상이 다르며, 재는 자의 눈금이 다르다. 물건의 양을 재는 사람, 인금나름을 하는 사람, 가상화폐의 오늘과 내일 시세를 재보는 사람, 일상인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가치를 재며 다른 방식의 삶에 몰두하는 사람 등등. 그런데 사람살이에는 잴 수 없는 것, 맹목의 진심만이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세계도 있다. 사람과 사람이 깊이 닿는 마음의 세계에서, 무언가 신비한 존재 사건이 발생하고 유지되는 일은 ‘생활인들’이 들고 다니며 재는 ‘자’의 너머에서 일어난다. 머리가 재기 전에 마음과 마음이 서로 먼저 가닿아 대화하고 공감하는 진심의 세계가 있다. 거기에서는 세속의 ‘자’가 무용지물이다. 마음의 주체가 일상의 자를 쓰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내 마음의 현재 상태가 무엇을 기준으로 현재 삶의 시간을 재고 있는지 실은 자신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의 사건에도 헤아림이 아예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신비하고 깊이 있는 마음의 율동에서는 생활인의 척도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헤아림이 작동한다.
#인문정신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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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 문학평론가.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인문연구소장을 지냈다. 현재 플라톤아카데미가 지원하고 있는 <인문정신문화 확산을 위한 포털 설립을 위한 연구> 공동연구원으로 참여 중이다. |
공준으로서의 자
‘척(尺)’은 도량형의 단위로서, ‘자’라는 말의 한자를 일컫는다. 낚시꾼들이 큰 고기를 낚았을 때 ‘월척’했다는 말을 쓰는데, ‘한 자 넘는’ 고기를 잡았다는 뜻이다. ‘자’를 뜻하는 ‘척(尺)’은 상형문자다. 손바닥을 펴서 무언가를 재고 있는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표현한 ‘그림’이다. 무언가를 재는 기준으로 쓰는 도구인 ‘자’처럼 각종 도량형의 측정이 원래는 ‘한 뼘’같은 신체 비례를 기준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립자의 세계를 재는 아주 작은 자나, 상상하기 어려운 광대무변의 우주공간을 잴 수 있는 엄청난 규모의 자들까지 나왔다. 이런 자의 발명을 통해 사람 시야 너머에 사람의 시야와 기준이 포괄하지도 못하고 추측하지도 못하는 규모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물의 길이와 부피와 무게를 재는 ‘자’는 공간 감각의 기준을 제공하고, 개인 간 물건 교환을 가능하게 하며, 측정을 통한 각종 기술의 발달, 세금의 수취 등 문명의 전진에 있어 전방위적인 필수물이다. 자는 기준 없는 세계에 기준을 부여하여 개별적이고 파편적인 감각에 계측에 관한 통일적인 원근감과 보편적인 합의의 기준을 부여한다. 법의 정신을 상징하는 정의의 여신이 한 손에 천칭을 들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인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준다’는 말은 정의가 ‘몫’을 정확히 잴 수 있는 자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함의를 지닌다.
공준이 가능할까
그러나 자연의 물리량을 계측하는 세계와는 달리 사회라는 인간계에서 누구나 합의할 수 있는 보편적 기준, 통일적인 척도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관점과 가치와 개인들의 사회적 위치, 문화적 차이와 역사적 단계에 따라 ‘기준’은 유동적이다. 인류라는 보편성을 이야기하지만, 차이는 보편성을 무색하게 할 만큼 크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그른가, 아름다움과 추함의 기준, 적절함과 부적절함, 정당함과 정당하지 않음의 기준은 각자 다르고 그래서 극히 불안정하다. 법과 도덕적 기율이 사회마다 시대마다 다르고, 경우에 따라서 그 내용이 매우 상이하기도 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사회에 행위의 공준으로서 강력한 터부와 법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으로 ‘자’의 불완전성을 증명한다. 삶의 역동 안에는 정해놓은 ‘자’를 인정하기 어렵고, 설령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자’ 자체가 생명을 제어하는 억압기제라는 인식을 통해 그에 저항하는 생명의 움직임이 있다. 분별도 하지 말고, 기준도 만들지 말라는 노자나 장자의 말씀도 결국 인공의 자를 만드는 일 자체가, 또 자를 정교화 하면 할수록 인간이 자연의 생기로부터 멀어진다는 얘기를 하는 거다. 그들이 반감을 보였던 문명화는 결국 ‘자’를 정교화 하는 문명화다.
어떤 사회가 강력한 통일적 척도로서 ‘하나’의 자를 갖게 될 때, 그 사회는 완전하고 더 효율적인 사회가 될까.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명령과 지시와 수행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지는 사회가 보다 진화한 세계일까. 최근 일본이나 중국 등 이웃나라에 대한 한국인의 반감을 관찰해 보면, 한국사회는 ‘하나의 상상의 자’를 완고하게 가진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한 국가 안에서도 개인들이 처한 다양한 정체성의 차이, 경험의 차이 의견의 차이 등을 무화시키고 하나의 관점과 생각으로 의견들을 통일시키려는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자’가 그것이다. ‘내로남불’이라는 용어는 이율배반에 관한 말로 21세기 한국사회에 무척이나 친숙하게 유통되고 있는 사회적 용어다. ‘내로남불’은 내가 지닌 ‘자’가 자기 자신에게도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자기분열 양상을 지시하는 동시에, 내 자를 기준으로 타인을 계측하고 억압하는 양상을 드러내는 증상적 용어다. 어떤 ‘자’는 남에게 엄격하게 들이밀기보다는 자기 모습을 재보는 데에만 사용하는 게 낫다. 그런 ‘자’를 우리 조상들은 ‘신독’(愼獨 스스로 자기를 살핌)이라고 불렀다.
생활인의 자가 닿지 못하는
사람살이를 하다 보면 정교하고 타산적인 생활의 ‘자’를 늘 들고 다니며 그것을 너무도 잘 사용하는 현명한 생활인들을 만나보게도 된다. 더치페이도 명확하고, 절세의 지혜도 탁월하며, 투재 대비 가성비를 기막히게 잘 재서 물건을 사는 방식을 보면 감탄을 하게 하는 생활인들. 무심한 일상인들은 잘 모르는 어떤 기회마다 응모하여 깜짝상품에 당첨되었다고 자랑하기 좋아하는 지인도 내 주변에는 있다. 사회적 척도에 따라 인생스케줄을 장기적으로 잘 재고 기획하여 시간을 잘 규율하며 사는 풍경은 우리네 일상적 풍경이다. 이런 풍경에서 ‘삶’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고, 어쩌면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장부의 일부로 ‘계산’되면서, 온전히 ‘살아지지’ 않고 자주 유예된다.
시인 김수영은 “무엇이든지/재볼 수 있는 마음은/아무것도 재지 못할 마음”이라며, “삶에 지친 자여/자를 보라/너의 무게를 알 것이다”(「자(針尺)」)는 시를 쓴 적이 있다.
사람들마다 재는 대상이 다르며, 재는 자의 눈금이 다르다. 물건의 양을 재는 사람, 인금나름을 하는 사람, 가상화폐의 오늘과 내일 시세를 재보는 사람, 일상인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가치를 재며 다른 방식의 삶에 몰두하는 사람 등등. 그런데 사람살이에는 잴 수 없는 것, 맹목의 진심만이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세계도 있다. 사람과 사람이 깊이 닿는 마음의 세계에서, 무언가 신비한 존재 사건이 발생하고 유지되는 일은 ‘생활인들’이 들고 다니며 재는 ‘자’의 너머에서 일어난다. 머리가 재기 전에 마음과 마음이 서로 먼저 가닿아 대화하고 공감하는 진심의 세계가 있다. 거기에서는 세속의 ‘자’가 무용지물이다. 마음의 주체가 일상의 자를 쓰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내 마음의 현재 상태가 무엇을 기준으로 현재 삶의 시간을 재고 있는지 실은 자신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의 사건에도 헤아림이 아예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신비하고 깊이 있는 마음의 율동에서는 생활인의 척도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헤아림이 작동한다.
#인문정신 #영성
문학평론가.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인문연구소장을 지냈다. 현재 플라톤아카데미가 지원하고 있는 <인문정신문화 확산을 위한 포털 설립을 위한 연구> 공동연구원으로 참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