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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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클래식] I. 베토벤 인생의 성장기 (오지희)

2021-10-22

I. 베토벤 인생의 성장기

- 가족과 스승

베토벤! 그 이름을 듣고 경외심을 품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그 음악을 듣고 절로 숙연함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베토벤은 어떻게 고전음악의 중심에 서 있으며 영원한 예술로 남겨진 클래식음악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을 추구할 수 있었을까. 한 인간의 참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성장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가족의 면면과 위대한 음악가의 길로 이끈 스승의 역할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1770년 신성로마제국에 속하는 도시 본(Bonn)에서 출생했다. 베토벤 고향이 본이 된 것은 조부의 역할이 크다. 베토벤과 이름이 똑같았던 음악가 루드비히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12~73)은 본 선제후였던 막시밀리안 프란츠 눈에 들어 21세에 본으로 이사왔다. 음악 역사에 찬란히 빛나는 손자의 명성과는 비할 수 없지만 나름 음악 재능을 발휘하며 성악가로, 지역의 저명한 궁정음악가로 활동했다. 안타깝게도 조부는 베토벤이 3세 때 사망했는데, 베토벤은 아버지보다 기억에 없는 할아버지를 훨씬 자랑스러워했다. 아버지 요한(Johann van Beethoven 1740~92)은 할아버지의 유일한 생존 아들이자 못나고 부족한 자식이었다. 가뜩이나 못마땅한 상황에서 부자관계는 한번 결혼했던 여자와의 만남으로 더욱 악화됐다. 요한은 마리아 케베리히(Maria M. Keverich 1746~87)와 1767년 결혼했다. 원래 명망있는 가문의 딸이었던 마리아는 첫 번째 결혼상대는 일찍 죽고 몇 년 후 재혼한 남편 요한과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남편으로 인해 생활고를 겪었던 아내는 우울증과 무기력증으로 고생했다. 부부 사이에 모두 7명의 아이들이 태어났으나 둘째였던 루드비히와 밑으로 두 남동생만 살았다. 어머니가 40세를 갓 넘겨 병으로 사망하자 그나마 어머니를 사랑하고 의존했던 아들 베토벤은 16세 때 희망 없는 아버지와 두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실질적인 가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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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베토벤 조부, 루드비히 베토벤 | (우)베토벤 부모, 요한과 마리아

어찌됐든 베토벤의 타고난 음악적 재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이어지는 음악가 집안에서 나온 결과였다. 베토벤의 첫 음악 선생이었던 아버지 요한은 일찍이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봤다. 조금 앞선 모차르트가 어떻게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는지 익히 알고 있었던 요한은 자신도 모차르트 아버지 행보를 좆으려고 발버둥 쳤다. 그러나 진정한 신동이었던 모차르트에 비해 베토벤은 대기만성형이었고 아들의 교육에 헌신적이고 안목이 있었던 모차르트 아버지와 달리 베토벤 아버지는 욕심이 앞서고 과격하며 교육자로서 부족했다. 잠재적 음악성을 꽃피우기 전 유명한 음악가로 키우기 위해 베토벤 아버지가 아들을 어떻게 훈련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널리 회자된다. 자는 어린 아들을 술 먹고 깨워 밤새도록 피아노를 치게 하거나 피아노를 제대로 못 친다고 때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레슨 받으면서 아이는 울기도 했다. 한편 베토벤은 8세 경 첫 데뷔 연주회를 열었는데, 아버지가 나이를 2살이나 낮춰 적었다.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길 바란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베토벤은 어린 마음에 실력 발휘를 제대로 못해 첫 연주회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아버지의 강압적인 훈육과 사려깊지 못한 행동은 어린 베토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베토벤은 평생 아버지 요한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베토벤을 설명하는 괴팍하고 이해하기 힘든 성격 형성에는 타고난 고집과 의지도 물론 있겠지만 어린 시절의 불행한 가족사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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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13살의 베토벤 | (우)청년기의 베토벤

그랬던 아버지도 베토벤의 음악교육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새로운 선생을 찾아 나섰다. 베토벤의 진정한 첫 스승은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 1748~98)이다. 사실 네페 이전에도 또 다른 선생이 있었는데 운이 없게도 아버지처럼 베토벤을 때리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음악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본받을 만한 스승은 네페가 처음이었다. 오페라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활동하던 네페는 1782년 본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부임하면서 베토벤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네페 문하생으로 오르간도 연주하고 소나타와 리트, 바흐 작품을 연구하며 작곡도 배운 베토벤은 이 때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발표했다. 네페는 훌륭한 작곡가라기보다 음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원리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학자에 가까웠다. 뛰어난 작곡법을 알려주지는 못했어도 제자 베토벤의 음악적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이런 네페와의 좋은 인연은 평생 지속됐다. 훗날 계몽군주로 알려진 합스부르크 왕가의 요제프 2세가 사망했을 때 베토벤이 장례 칸타타 작품을 쓰게 된 계기도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네페가 주도하던 독서협회에서 위촉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으로 베토벤은 대작곡가 하이든의 인정을 얻었고 이후 자연스럽게 귀족들의 관심과 후원을 받게 됐다. 베토벤이 음악적으로 한 단계 성장하는 과정에서 네페의 역할은 실로 지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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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티안 고틀롭 네페

베토벤 청년시절 당대 최고의 작곡가는 당연히 하이든과 모차르트였다. 베토벤도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존경하고 선망했다. 청년 베토벤 시기는 두 작곡가 선배의 말년과 겹친다. 1786년 10월에 16세 청년 베토벤은 모차르트에게 작곡을 배우겠다는 희망을 품고 빈으로 간 적이 있다. 1786년 5월 모차르트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빈에서 발표했고 12월부터 이듬해까지 프라하에서 성공적으로 공연했다. 1787년 4월부터는 오페라 돈 조반니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대작을 무대에 올리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경제적으로도 궁핍했다. 1791년에 사망한 모차르트의 마지막 5년간이 대작이 쏟아져 나온 시기임을 생각하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더구나 베토벤도 이듬 해 5월에 어머니 병환이 위중하여 급히 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차분하게 만나 음악을 가르치고 교류할 상황이 아니었다. 모차르트가 베토벤 즉흥연주를 듣고 언젠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인물이라고 말했다는 에피소드는 사실 그 근거가 확실치 않다. 실제 만났는지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베토벤은 모차르트를 진정한 거장으로 받아들였고 빈에서의 모차르트 활동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베토벤이 초기에 작곡한 피아노협주곡 1~2번과 교향곡 1번, 바이올린 소나타에는 존경하는 모차르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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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하이든 | (우)모차르트

노장 하이든도 분주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이든은 28년간 일했던 주군 에스테르하지 공작이 1790년 죽자 런던으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했다. 그 해 하이든이 빈에서 런던으로 가는 길에 본에 들려 막시밀리안 선제후를 방문했다. 그 때 선제후가 하이든에게 베토벤을 소개했는데,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한 후 1년 반 뒤 런던에서 빈으로 돌아올 때 본에 들려 베토벤을 만났다. 베토벤이 요제프 2세를 위해 작곡한 장례 칸타타를 하이든이 듣고 베토벤을 칭찬한 시기가 바로 이 때다. 하이든 덕분에 베토벤은 그렇게 고대하던 음악도시 빈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됐다. 네페에 이어 베토벤이 또 다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베토벤이 하이든 제자로 작곡 수업을 받을 때 스승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은 베토벤이 워낙 주관이 강하기도 했지만 틀린 부분을 일일이 확인하고 음악적으로 고쳐가며 수업해야 하는 작곡기법을 하이든이 너무 바빠 제대로 살펴주지 못했던 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심지어 베토벤은 다른 사람에게 비밀 레슨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하이든은 베토벤의 불만뿐 아니라 그의 진가도 알고 있었다. 미래의 위대한 베토벤이라 하더라도 대가 하이든의 명성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고 혈기왕성한 베토벤의 출중한 개성 역시 숨길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존중하는 사이였다. 하이든이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면서 두 사람의 사제관계는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비록 하이든과 모차르트에게 원하는 수업을 받지는 못했지만 두 작곡가의 존재와 작품은 베토벤에게 빛나는 스승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우여곡절은 있었어도 베토벤은 꾸준히 앞길을 열어가며 고향 본을 떠나 빈으로 진출했다. 빈으로 간 이후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본을 떠날 때 친구이자 후원자인 발트슈타인 백작이 쓴 송별의 편지는 미래의 위대한 악성 베토벤을 예견하고 있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아직도 후계자를 찾지 못해 슬픔에 잠겨 있소. 그는 지칠 줄 모르는 하이든에게서 피난처를 찾았지만, 거기에 안주하지는 않을 것이오. 모차르트의 영혼은 하이든을 통해 누군가와의 결합을 원하는 것이니, 끊임없이 노력해 하이든의 손을 통해 모차르트의 영혼을 전달받기를 비오. 1792년 10월 29일, 본에서, 자네의 진실한 친구, 발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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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_오지희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과 음악사를 전공한 후 백석문화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음악평론가와 클래식음악 전문해설가로 활동중이다. 클래식음악을 넘어 다양한 공연예술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2018년 출판한 평론집 <음악에 글을 새기다> 는 이러한 필자의 활동을 담은 대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