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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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M.lab] 수행이란 습관을 바꾸는 일(조성택 교수)

2023-01-18

삶의 주인이 ‘나’라는 말은 언제나 옳다.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부처님께서 ‘내가 없다’라 하신 것은 삶의 주인이 없다고 하신 것은 아니다. 무아(無我)를 일상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이 곧 나”라는 의미다. 지금의 내 모습은 지난 세월 살아온 모습의 결과이듯이 지금 내가 행하는 것은 미래의 내 모습이 된다.

삶을 바꾸길 원한다면 행동을 바꾸어야 한다. 반복되는 행동을 우리는 습관이라고 한다.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은 행동이 된다. 행동은 [반복되면] 습관이 된다. 습관은 성격이 되고 성격은 인생이 된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요 종교학자인 윌리엄 제임스(1842-1910)의 말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 세대가 이룩한 발견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습관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한다. 이 말은 맞는 말이지만 “우리 세대의 발견”은 아니다. 이미 이천 오백년 전 부처님께서 누누이 설명하셨던 내용일 뿐 아니라 ‘습관을 바꾸는’ 매뉴얼 또한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신·구·의 삼업(三業)이 곧 생각, 말, 행동이 아닌가? 반복되는 행동, 습관이 곧 업(業)이요 업장(業障)이다. 일상에서 실천되지 않는 가르침은 그냥 ‘주문’일 뿐이다.

 

수행은 어렵다. 수행이 어려운 것은 습관을 바꾸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른 취침과 이른 기상 같은 개인의 일상 습관을 바꾸는 일은 일정한 의지와 노력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중생으로서의 업, 즉 오랜 진화과정에서 형성되어 온 생물학적 개체로서의 습관/업은 바꾸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습관은 개인의 유전적 환경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 측면도 있고 또 보다 근본적으로는 개체보존이라고 하는 생물학적 본능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을 만나면 우리는 맞서 싸우거나 도망간다. 진화의 과정에서 습득된 자동화된 방식으로 반응한다. 대부분 ‘몸’이 먼저 반응한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눈동자는 커지고 심장은 더 많은 피를 공급하면서 공격하거나 도망하는데 최적의 신체적 조건을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지금부터 싸워야 하니 심장아 더 많은 피를 공급해줘”라 하지 않는다. 이 과정은 말 그대로 자율적이어서 나의 의지나 의도가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욕망이나 질투 불안 등 흔히 번뇌라고 하는 부정적 마음의 상태도 생존을 위한 몸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반적으로 십이연기는 전생, 현생, 내생의 삼세 윤회의 도식으로만 알고 있지만 실은 인간의 ‘자동화’ 된 욕망의 발생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욕망의 발생 과정이 순관(順觀)이라면 그 소멸의 과정이 역관(逆觀)이다. 무명(無明)과 행(行)이라고 하는 인간의 실존적 상태에서 출발하여 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자동화되고 패턴화 되어 있어, 마치 영구기관처럼 연쇄적으로 욕망의 연쇄 반응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중생적 삶의 습관, 악순환이다. 흔히 마음 챙김이나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인과적 연쇄의 고리를 잠시 들여다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들여다본다’고 하는 것은 이 악순환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으로 ‘습관’의 악순환을 끊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지만 습관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 시키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 마음을 수행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의 습관을 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계를 지킨다고 하는 것은 올바른 정과 혜를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일종의 필요조건이지만, 결국 생각의 습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정과 혜를 통해서이다. 마찬가지로 팔정도의 출발이 정견(正見)인 것도 올바른 견해가 올바른 생각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내가 어떻게 정견을 가질 수 있을까? 그래서 스승이 필요하고 종교가 필요한 것이다. 불자(佛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견해를 올바름의 기준으로 삼겠다고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견해를 일상에서 늘 유지하고 견지하는 일은 어렵다. 오래된 가르침을 지금에 적용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중생으로서의 습관을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출가하여 일생을 걸고 수행하시는 스님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일반 재가자들로서야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으로 사는 나쁜 습관을 버리고 ‘부처님과 같은’ 좋은 삶의 습관을 만듦으로써 행복한 삶, 좋은 삶을 살고자 하는 향상의 바램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이를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비교적 쉽고 분명하게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이른바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다. 다음은 삶의 습관을 바꾸는 한 방법으로서 메소드 연기를 소개하는 건축가이자 글쟁이 이종건의 말이다.

배우가 자신이 진실로 극중 인물인 것처럼 하는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

곧 연기를 통해 ‘다른 존재되기’ 방식의 연극행위는, 때때로 그 과정에서 배우의 정 체성이 실제로 재창조되기도 한다. 마치 무대의 연기처럼 실제로 타자가 되기도 한 다. 그만큼 연극기술은 우리의 자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지녔는데,

기독교 순교자의 연극을 맡은 제네시오(Genesius)가 자신의 역할에 신실한 나머지 연기 도중에 실제로 개종을 하는 바람에 연극 도중에 처형당한 일화는 무척 흥미롭다.

우리가 환기해야 할 논점은 이것이다. 연극기술은 좋은 습관을 형성해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다만 첫 걸음이라는 것. 따라서 그 걸음을 걷고 또 걸으면, 언젠가는 자신과 자신의 바램이 하나가 된다는 것.

 

기억하는가? 수년 전 도법스님의 주창으로 시작되었던 ‘붓다로 살자’라는 운동. 이 운동이 불교계에 처음 등장하였을 때 일부 긍정적인 호응도 있었지만 종단 권력 다툼과 연계되면서 흐지부지 되어 버렸고, 그런가 하면 ‘붓다로 살자’의 의미를 오해하여 운동 자체를 폄하하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붓다로 살자’는 일종의 수행운동이었다. 관념화 된 불교를 구체적 삶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며, 일상과 유리된 수행을 다시 일상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수행결사였다. ‘붓다로 살자’라는 것은 중생이 붓다인 척(pretend) 하자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끊임없이 상기하면서 좋은 삶을 살고자 하는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의 수행법이다. ‘부처님 이라면’(as if)의 연기를 통해 좋은 습관을 체화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내가 연기하는 ‘부처님’은 대웅전의 불상같이 늘 똑같은 변함없는 부처님이 아니라 내가 향상하면서 함께 커가는 부처님이다.

붓다로 살고자 하는 것은 중생으로 살면서 부처인 척하는 삶이 아니라, 부처를 닮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내 안의 부처를 키워가고자 하는 일상의 약속이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