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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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M.lab] ‘바른 견해’(正見)의 일상적 실천 (조성택 교수)

2022-06-13

바른견해(正見)이란?

MZ세대 한 작가는 “인간으로 태어나 소비자로 자랐다”는 탄식으로 오늘날 소비지상의 세상 에서 주체적 인간으로 살아가기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답게’ 산 다는 것은 어렵다는 의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교인이 되기는 쉬우나 불교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렵다. 불교인이 되는 것은 나의 선택이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불교인답게’ 살아가는 것인지는 만만치 않은 문제이기 때 문이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지만 가르침을 현실에서 실천하 는 일은 녹녹치 않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실천이 부족하다면 더 노력하면 된다. 교리나 가르침의 내용을 몰라서도 아니다. 중도(中道), 팔정도(八正道), 연 기법(緣起法), 무아(無我) 등도 이해하고 있고 경전공부도 웬만큼 했다. 그래도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이 ‘불교적’인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이 글에서는 팔정도의 첫 항목은 정견(正見)의 일상적 실천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바른 견해’를 뜻하는 정견은 팔정도 수행의 출발이자 토대이며, 또한 수행의 목적지인 바른 지혜를 뜻하기도 하다. 그렇게 본다면 바른 견해를 갖는다는 것은 불교인으로 살기 위한 전 과정에서 견지되어야 할 내용이다.

정견의 일상적 실천을 염두에 둘 때, 바른 견해란 ‘특정한’ 견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확 신이라는 무지(無知)를 인지하는 일이다. 견해는 사태를 이해하는 방식이면서 판단의 근거가 된다. 예나 지금이나 바르게 판단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 때’는 옳았지만 ‘지금’ 은 틀린 경우도 있다.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은 최선의 노력만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의미일 것이고 이는 불교적 맥락에서 보더라도 그리 어긋난 말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바른 견해란 바르게 판단하고 최선 의 노력을 위한 첫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른 견해 그리고 바르게 판단하는 일을 방애하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탐·진·치 세 가지로 요약된다. 욕망이 바른 판단을 장애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된다. “돈에 눈이 멀 어”, “사랑에 눈이 멀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욕망이 우리의 바른 판단을 장애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재물이든 명예이든 혹은 성적(性的)인 것이든 일단 욕망에 사로잡히면 욕망을 달성하 는 일 외에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두 번째로 우리의 판단을 장애하는 것은 분노다. 분노는 분개와 다르다. 분개는 정당하지 못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정의감의 발로이지만 분노는 시기 질투의 소산이다. 분노로서는 사태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고 세상도 자신도 바로 잡지 못한다. 분노를 표현할 때 “앞뒤 가리지 않고”라는 말을 쓴다. 사태의 전후 맥락을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분노의 결과를 헤 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욕망과 분노의 문제는 주로 개인 인격의 문제이기도 하고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쉽게 알아차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조절이 가능한 문제들이다. 우리의 바른 판단을 장애하는 보다 근본적인 장애는 바로 ‘앎’이다. 몰라서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섣부르게 아는 것 이 바른 판단의 장애가 된다. 욕망과 분노가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라면 섣부른 앎은 우리의 ‘귀’를 닫게 한다. 내가 해 본 ‘경험’ 내가 읽어서 아는 ‘지식’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개인이나 조직의 잘못된 판단의 대부분은 다른 의견을 무시하고 듣지 않는데서 발생한다.

우리는 자신이 경험했거나 읽고 배운 것 외에 다른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 이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경험과 지식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확신의 무지’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소피스트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이 가 진 ‘확신의 무지’를 지적했던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것은 ‘무지에 대한 자각’ 을 강조한 말이었다.

확신하고 단정하는 것에 대한 경계는 동아시아 유교 전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자는 생전 에 다음 네 가지를 결코 하지 않았다고 한다. 통칭해서 자절사(子絶四)라고 하는데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가 그것이다. 요컨대 ‘단정하거나 치우친 판단’이 없고, ‘반드시 그러하다는 집착’이 없으며, ‘자신이 옳다는 완고한 고집’ 이나 ‘자신만을 내세우는 아 집’이 없었다는 것이다.

‘확신’(certitude)과 확실함(certainty)은 다르다. 확신이란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기반 한 주관적 믿음일 뿐이다. 반면에 객관적 확실함이란 엄밀하게 말한다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신 (神)의 영역’이고 깨달은 자의 전지적(全知的) 살반야(薩般若)의 영역이다.

원효가 그의 화쟁론을 설파하는 가운데 제시하고 있는 ‘장님과 코끼리’의 예화는 경험과 지 식에 갇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님들은 자신이 만진 것만을 코끼리라고 생각한다. 코끼리 다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는 기둥과 같다’ 고 주장하고 배를 만진 또 다른 장님은 ‘코끼리는 벽과 같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결코 온전한 코끼리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잠시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온전한 코끼리의 모습에 다가 갈 수 있다. 요컨대 자신의 확신을 내려놓고, ‘입’이 아니라 ‘귀’를 열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코끼리의 모습에 조금씩 다가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예화에서 ‘장님’이란 ‘코끼리’의 전모를 알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의미한 다. 그리고 ‘코끼리’는 함께 모색해야할 ‘진실’ 혹은 ‘옳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사회라면 공동 선일 것이고 회사와 같은 조직이라면 당면한 현안에 대한 최선의 올바른 결정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 알고 있는 것 외에는 알 수 없다. 구성원 각자가 자신이 옳다고 만 주장하면서 ‘입’만 열고 ‘귀’를 열지 않는 다면 여러 의견들은 그냥 소음일 뿐 문제 해결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한다. 내가 만진 것만이 코끼리라는 확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견(正見)을 일상에서 실천한다는 것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한계를 인정하는 일이다. 이는 결코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훼손하는 일이 아니다. ‘더 향상 된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 곧 팔 정도(八正道)의 첫 출발이다.



대화, 바른견해의 일상적 실천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대화가 쉽지 않다는 것 또한 늘 경험 하는 일이다. 꼬인 관계를 풀기 위해 시도했던 대화가 또 다른 갈등을 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 다. 개인 간의 대화에서만이 아니다. 공적 대화라고 할 수 있는 회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구 성원 간에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고 현안에 대한 더 지혜로운 결론을 이끌어 내고자 시도했 던 회의가 서로 다른 입장 차이만 부각될 뿐 아무런 해결책을 만들지 못하고 교착되는 경우도 있다.

왜 그럴까? 대화를 잘 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로써 설득하는 것을 대화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을 대화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서점가에 나와 있는 자기 계발서에서 강조하는 대화 또한 주로 상대를 설득하고 내 생각을 관철하는 일종의 언변 술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설득을 위한 대화란 결국 ‘창’과 ‘방패’의 싸움일 뿐이다. 어떠 한 방패도 뚫을 수 있다는 ‘창’(모,矛)과 어떠한 창도 다 막을 수 있다는 ‘방패’(순,楯)와의 싸 움이다. 여기서 승자는 누구일까? 그야말로 모순(矛盾)이다.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던 원효의 ‘장님과 코끼리’ 예화로 돌아가자. 코끼리의 다리를 만진 장 님은 코끼리는 ‘기둥’과 같다고 한다. 배를 만진 장님은 ‘벽’과 같다고 한다. ‘벽’과 ‘기둥’은 모순관계다. 각자가 만진 것만을 코끼리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 일까? 설득을 위한 대화란 결국 각자의 ‘옳음’을 주장하는 상황일 뿐이다. 어느 한쪽이 양보를 한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각자가 ‘자신의 옳음’만을 주장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정한 ‘코끼리’를 찾아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회의가 표류 하고 대화가 교착되는 상황은 서로가 서로를 설득하려고만하기 때문이다. 사안에 따라 양보와 타협이 가능한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은 양쪽의 힘이 불균형적 상황인 경우가 많고, 또 그렇게 만들어진 타협은 지속적이지 않다. 진정한 의미의 양보와 타협을 위해서는 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 ‘나의 코끼리만 코끼리’라는 주장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다. 요컨대 입을 닫고 귀를 여는 것이 대화의 시작이다.

대화란 말을 ‘주고받는’ 과정이다. ‘말하기’와 ‘듣기’의 과정이 대화다. 실제로 대화에서 더 중요한 것은 ‘말하기’보다 ‘듣기’다. 우리는 흔히 대화를 통해 나를 이해시키고 상대방을 설 득하려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내 귀를 여는 것이다. 내가 상대를 이해하는 만큼 나를 상대에게 이해시킬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대화란 ‘나의 옳음’을 잠시 유보하고 ‘타인의 옳음’에 대해 숙고하는 과정이 다.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은 그의 책 『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에서 소크 라테스의 대화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대화는 상호 간의 명상이며 친절과 자비로운 태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선한   믿 음과 악의 없는 태도로 질문과 답변이 교환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마련 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생각에 주의 깊게 공감적으로 경청하고 자신의 확신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해야한다.

[『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 권혁 역, 돋을새김, 2012, 172쪽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곧 나를 내려놓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 이는 태도를 말한다. 이러한 가운데 “자신의 확신이 흔들리는 경험”이 대화의 본질이다. 개인 적 대화에서만이 아니다. 회의와 같은 공적 대화에 있어서도 이러한 대화의 원칙은 마찬가지 다.

조직 내에서의 회의란 해결을 위한 중지(衆智)를 모으는 과정이다. 즉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기 위한 것이다. 요즘의 대중지성에 해당되는 말이다. 한국 절 집안에서 내려오는 “바보 셋이 문수 지혜보다 낫다”는 말도 결국은 뛰어난 한 사람의 지혜보다 여러 사람의 중지(衆智) 가 더 소중하다는 말일 것이다. 티베트의 종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우리는 말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 말할 뿐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하였다. 회의석상에서 나에게 반대하는 다른 의견을 대하면 기분이 상 하고 심지어 화를 내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이는 새로운 것을 알고, 배우게 되는 기회다.


 


단 상대방의 의견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말꼬리를 잡거나 상대방 말의 허점을 공격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때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

경청, 주의 깊게 듣는다는 것은 더 큰 지혜를 모으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그치지 않는다. 또 다른 이로움이 있다. 경청은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다. 이청득심(以聽得心), 『논어(論語)』‘위정편’에 나오는 말이다. 아마도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일 것이라 생각한다. 가족, 친구, 직장 등 조직 내에서 서로 간에 충고, 조언 그리고 평가와 칭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일이다. 단정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듣는 것이 경청이다. 경청은 상대방의 입장과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다. 충고나 조언은 그 다음의 일이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쓴 존 그레이는 자신의 첫 번째 결혼의 실패 원인 을 ‘듣지 않고 해결책만 제시’하였던 자신의 태도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태도는 주 로 남자들에게서 드러나는 것이지만 성별을 떠나 인간의 일반적 태도이기도 하다. 친구 혹은 후배가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건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생각 해”라든가 “ 아, 나도 겪어 봤는데”라면서 이러저런 조언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친구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런 해결책을 몰라서 나에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힘들기 때문에 얘기를 하는 것이다. 충고나 조언보다 더 필요한 것은 ‘그냥’ 들어주는 사람이다. ‘아, 그랬구 나’ ‘ 힘들겠다’ ‘나라도 그랬겠어’ 하면서 상대의 입장에서, 공감하는 마음으로 얘기를 들어주 는 태도다. 판단하지 않고 ‘그냥’ 들어주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요, 진정한 선배다.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하는 조언과 충고는 소음이거나 잔소리일 뿐이다. ‘그냥’ 들어주 면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마음을 얻은 후에는 잔소리조차도 훌륭한 ‘조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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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