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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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희망] 더불어 살 수 있을까? 마음을 인정하는 삶 (나진경 교수)

2024-09-25

더불어 살 수 있을까? 마음을 인정하는 삶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유명한 르네 데카르트는 ‘신체’와 ‘마음’이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 대표적인 심신이원론자였습니다. 가령 동물은 신체는 있지만 마음이 없다고 믿어 동물은 움직이는 기계라는 이른바 동물 기계론을 펴기도 하였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데카르트가 살아 있는 개의 생체해부에 참여하며 개가 보이는 고통의 울부짖음을 고장난 기계가 내는 소음과 같다라고 한 일화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오늘 날의 기준으로 보면 너무 잔인한 일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는 어떨까요? 올 해 5월 작고한 동물행동학자 프란스 드 발 (Frans de Waal)은 사람들이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가 몸부림 치는 것을 보며 양심의 가책이나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물고기에게는 고통을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자의식’과 ‘마음’이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리고 우리가 마음을 허락하지 않는 현상은 비단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에게만 국한된 것일까요? 우리는 ‘우리’가 아닌 ‘그들’에게도 ‘우리’만큼의 마음을 허락하고 있을까요? 이번 칼럼에서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더불어 사는 삶의 출발점이 아닐까하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의 정신 작용은 아직 풀리지 않은 인류의 난제입니다. 멋진 음악에 감동하고, 감미로운 맛을 음미하며, 세상사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는 ‘나’를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일은 정말이지 신비로운 일입니다. 특히, 인간을 뛰어 넘는 인지 기능을 보이는 인공 지능에게조차 주관적 자의식이 아직 허락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면, 인간의 자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 인간의 마음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더 이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과 자의식은 뇌의 활동에서 기인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뇌의 화학적/전기적 활동이 어떻게 정신 작용을 만들어 내는가를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할 뿐입니다. 인간의 육신에 그 어떤 신비로운 영혼이 깃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치매 환자나 안타까운 사고로 뇌의 구조적 혹은 기능적 손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마음의 작동에도 그에 상응하는 손상을 보인다는 수많은 사례들 앞에서 마음이 뇌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의 뇌는 분명 다른 동물들의 뇌와 차이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차이는 연속적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과 자의식이 뇌에서 온 것이라면 다른 동물들에게도 마음을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차이는 분명 있겠지만, 그것은 유무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일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의 몸부림은 살기위한 본능일 뿐이고, 물고기에게는 그 고통을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마음이 없다고 믿을 뿐입니다. 예전에는 신생아가 우는 것은 본능이고 자의식도 완전히 발달하지 않아 고통을 주관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마취 없이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취 없이 수술을 받는 신생아들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혈압과 심박수, 땀 분비가 증가하며 혈액 내 산소는 떨어지는 생리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른에게서 이런 변화를 관찰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과거 신생아들의 마음과 고통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은 우리의 착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몸부림 치는 물고기, 녹아 버린 빙하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곰의 마음을 외면하는 것도 우리의 실수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생각해보는 것이 지구에서 다른 동물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요?


비인간화(Dehumanization): 우리의 마음 vs. 그들의 마음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우리는 다른 사람 누구에게나 마음을 허락하고 있을까요? “독사 같은 놈,” “바퀴벌레같은 녀석” 우리는 우리의 적들을 흔히 다른 동물이나 벌레에 비유하곤 합니다. 놀랍게도 Harris와 Fiske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혐오하는 대상을 볼 때 그들을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비인간화(Dehumanization)라고 합니다. 인간의 뇌에는 다른 사람을 표상하기 위해 사용하는 네트워크가 있는데, 혐오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그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그들을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떤 ‘그들’은 능력이 모자란 하등 동물로 취급하기도 하고, 다른 ‘그들’은 감정도 없는 ‘기계’처럼 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이렇게 대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마음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확인되었습니다. 즉, ‘그들’의 절규, 눈물, 아우성, 몸부림을 보아도 그런 고통을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누군가가 동물의 절규를 고장난 기계가 내는 소음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죠.

반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함께 경험하는 것을 공감(Empathy)이라고 합니다. 공감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여러 가지 편향과 한계가 존재하고 공감도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가령 우리가 여러 가지 정보를 한 번에 다 처리할 수 없듯이 우리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공감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어느 어린 아이의 눈물에는 흔들리지만 숫자로 전해지는 수백명의 희생에는 무던할 수 있는 우리의 공감이 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인정하고 공감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허락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해도 문제를 피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라면,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느 쪽에서 실수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선택하는 것 아닐까요? 당신은 어느 쪽에서 실수하시겠습니까? 또 ‘우리’만이 아니라 ‘그들’과도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는 어떤 실패를 더 포용해야 할까요?



맺음말

인간의 마음이 인공지능과 다른 것은 생명이 있다는 점이고, 다른 동물과 보이는 차이는 더 사회적이라는 점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과 연대하며 어울려 사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참고한 것들

Psych: The Story of the Human Mind (by Paul Bloom)

Mama's Last Hug: Animal Emotions and What They Tell Us about Ourselves  (by Frans de Waal)

한겨레 기사: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97957.html)

Harris, L. T., & Fiske, S. T. (2006). Dehumanizing the lowest of the low: Neuroimaging responses to extreme out-groups. Psychological Science, 17(10), 847–853. https://doi.org/10.1111/j.1467-9280.2006.01793.x

Loughnan, S., & Haslam, N. (2007). Animals and androids: Implicit associations between social categories and nonhumans. Psychological Science, 18(2), 116–121. https://doi.org/10.1111/j.1467-9280.2007.01858.x



나진경

서강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및 희망연구소 소장
사회문화적인 요인을 중심으로 사람의 마음을 연구하는 사회심리학자